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문단 편집) == 기타 == * 성화는 [[천지(백두산)|백두산 천지]]와 [[한라산]] [[백록담]]에서 채화되어 [[임진각]]에서 합화되었다. 성화의 최종점화도 올림픽 유도 금메달리스트인 남한의 [[하형주]] 선수와 북한의 [[계순희]] 선수가 공동 점화했다. 북한 성화 봉송자들이 채화하고 [[금강산]]에서 만나 남한에 인계했다. 개최 몇달 전 제2연평해전 등의 악재가 있었으나, 여전히 활발히 진행되던 [[햇볕정책]]을 위시한 남북관계 개선사업에 기인해 가능했던 것. * 이 때까지만 해도 생존해 있던 [[대한민국]] 스포츠의 영웅이자 원로인 [[손기정]] 선생이 점화자로 검토되기도 했는데, 이미 건강이 상당히 악화되었던 터라 점화자로 발탁되지 못했다. 그래도 2002 아시안 게임을 끝까지 보고 사망하였다. * 개/폐막식 총연출은 유명 사극 PD [[김재형(PD)|김재형]]이 맡았다. 참고로 개막공연은 [[난타]]가 주 컨셉이었다. * 선수들의 숙소를 해결하기 위해 반여동에 '''[[해운대 아시아 선수촌]]이라는 대단지 아파트'''를 지었다. 숙소로 사용한 뒤에는 일반인들에게 분양되었다. 2,290세대로 반여동에서 제일 큰 아파트단지이기도 하다. * [[북한]]이 사상 처음으로 대한민국에서 열린 스포츠 대회에 참가한 대회이기도 하다. 북한은 그 동안 [[1988 서울 올림픽]]에 불참한 것을 비롯해서 대한민국에서 열린 수많은 스포츠 대회에 전부 불참했으나, 이 대회에 사상 처음으로 선수단을 파견한 것. 대한민국에서 [[인공기]] 게양과 [[애국가(북한)|북한 애국가]] 연주를 허락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에 따라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인 북한의 인공기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처음 게양되고 북한 국가가 처음으로 정식 연주되었다.[* 대한민국이 먼저 여유를 보여줌에 따라서 이후 북한에서 열리는 국제대회에서도 태극기 게양와 애국가 연주가 뒤늦게 허용되었다.][* 사실 국제스포츠대회는 국제스포츠단체가 주관하기 때문에 원래 국제대회 원칙에 따라야 한다.] * 북한은 선수단 외에 젊은 여성들로 구성된 응원단을 파견하기도 했는데, 이들은 '미녀 응원단'이란 별명이 붙어 당시에 상당한 관심을 받았다. 사실 대한민국에서는 북한 선수들의 참가와 공식적인 자리의 인공기 게양 같은 것보다는 이 응원단이 더 많은 관심을 끄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미녀 응원단으로 불렸던 이 응원단은 가는 곳마다 관중을 불러모았다. 그 외에도 북한은 스스로를 '북한'이 아닌 '조선'으로 일컫기 때문에 북한 응원단을 환영한다는 플랜카드에 있는 '북한'이란 문구를 보고 항의해서 철거하는 일도 있었다. * [[대만]]이 개회식 때 [[청천백일만지홍기]]를 들게 해 달라고 요구했으나, [[부산광역시]] 관계자에 의해 저지되었다. 아시안 게임에서도 올림픽처럼 청천백일만지홍기를 내걸지 못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 결국 [[올림픽]]에서 그렇듯 [[중화 타이베이]]의 깃발인 매화기를 달아야 했다. * [[대한민국 농구 국가대표팀|남자 농구 대표팀]]이 중국을 102:100으로 이기고 20년 만에 AG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국내 농구 팬들에겐 잊을 수 없는 영광의 순간이다.[* 단 이 경기는 논란이 상당히 많았던 경기이다. 이 이후에 중국이 한국과 경기를 할 때 대놓고 편파판정을 할 때가 늘었다.] * 이 대회의 공식 음악은 [[양방언]]이 작곡한 [[http://www.youtube.com/watch?v=vDd38LEu48Y&feature=youtu.be|Frontier]]라는 곡이다. 원래 이 곡은 2001년에 발매된 Pan-O-Rama라는 이름의 앨범에 수록되어 있던 퓨전 국악곡이었는데, 부산 아시안 게임 관계자가 우연히 이 곡을 듣고 공식 음악으로 선택하게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그런데 이 곡이 흥해서 현재까지도 인기를 끌고 있다. * [[축구]]의 경우 몇 달 전에 치러진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4강 신화에 힘입어 16년 만의 [[금메달]]을 노렸으나, 4강전에서 [[이란]]에 [[승부차기]]로 패해 [[3위 결정전]]으로 밀려나 동메달로 만족해야 했다. 승부차기 때 [[이영표]]가 날린 슛이 골대를 맞는 바람에 결승에 진출하지 못했는데, 세간에서는 이 골을 보고 일명 '''[[이동국]] 군대가라 슛'''이라는 별칭이 붙어졌고, 실제로 이동국은 바로 다음해인 2003년부터 광주 상무에 입대하여 병역 의무를 수행했다.[* 이동국 외에도 [[김용대]], [[김영철(축구)|김영철]] 등이 이 경기의 패배로 인해 병역 특례에 실패했지만, 아무래도 네임밸류가 높은 이동국의 이름을 따서 불린다.] '''이 사건은 한국 축구의 열기를 불과 100여 일만에 언제 그랬냐는 듯 사그러뜨린 사건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 대회를 통해 지도자 첫 감독 커리어를 시작한 [[박항서]]는 우승 실패를 이유로 부임 석 달 만에 전격 [[해임]]되는 어처구니가 없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 때의 자세한 정황은 [[박항서#s-3.3|박항서]] 문서에 서술되어 있다.] 이 때 이란 대표팀은 [[자바드 네쿠남]], 알리 다에이, 골모함마디, 바헤디, 카에비, 알리레자, 에브라힘 등 전력이 상당했다. 특히 와일드카드로 공격수와 골키퍼를 뽑는 등 준비가 철저했기 때문에 상당히 전력이 강했다. * [[부산 도시철도 3호선]]은 원래는 아시안 게임 개최에 맞춰 개통할 계획이었다. 주경기장 바로 옆을 [[종합운동장역(부산)|종합운동장역]]이 지나가도록 지어지기도 했고, 노선에 [[아시아드선]]이라는 애칭을 붙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1997년 외환 위기]]와 계획 변경[* [[미남역]] - [[안평역]] 구간을 지선으로 하려던 것을 경전철로 바꾸면서 4호선으로 분리된 것 등.] 등 이런저런 이유로 공사가 늦어져서, 실제 개통은 아시안게임이 끝나고도 3년이나 더 지나서야 가능했다. 그래도 아시안 게임 기간 동안 원활한 교통 흐름을 대비하기 위해서 [[미남역]]~[[거제역]] 구간의 경우 토목공사에 한해서는 예정대로 진행하였다.[* 그 증거로 해당 구간의 역사 출입구와 환풍구 디자인을 들 수 있다. 출입구의 경우, 다른 구간에 속한 역사의 그것과는 다르게 전체적인 형태는 [[부산 도시철도 2호선|2호선]] 2단계 구간과 거의 같고 마감재를 검정색 화강암으로 마무리 하는 등의 차이를 보여주었고 난간 장식도 부산 아시안 게임 공식로고를 금색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환풍구도 2호선 2단계 구간의 그것과 형상이 거의 유사하고 측면에 장식을 놓고 상부 마감은 검정색 화강암으로 마무리 하였다.][* 다만 출입구에 계단을 설치한 것은 [[종합운동장역(부산)|종합운동장역]] 5번, 7번, 9번, 11번 출구를 제외하고 대회 이후 2005년에 마무리 공사 동안에 설치하였다.][* 앞서 언급한 해당 번호의 출입구는 미남~거제역간 출입구 중에서 가장 먼저 2001년에 완공되었고 외부 마감조차도 2호선 출입구랑 완전히 똑같은 형태이다. 게다가 이 출입구는 3호선 개통 이전까지는 지하도 출입구로 임시로 활용한 전적이 있다. 다만 5번, 7번 출입구는 이후에 에스컬레이터 설치 공사로 인해 철거하고 다시 만든 전적이 있다.] * 부산 아시안 게임의 경기 진행 장소를 보면 창원시, 양산시, 마산시, 울산광역시 등 모두 그 당시 영남권에서 중소~대도시인 것을 알 수 있는데, [[양산시]]의 경우 본 아시안 게임을 대비해 [[양산종합운동장]]이 계획, 조성됐다. * 이 대회는 한국의 5대 국경일 중 [[개천절]]과 [[한글날]] 2개를 끼고 열렸다. 단, 한글날은 당시 공휴일이 아니었다.[* 1991년부터 공휴일에서 제외된 한글날이 공휴일로 다시 지정된 것은 2013년부터.] [[분류:2002 부산 아시안 게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